발제문 예시
『하나님의 모략』
1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가. 마 4:17, 마 6:9-10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 마태복음 4:17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마태복음 6:9-10 · 출처: 대한성서공회
나. 죽어서 가는 천국에서 지금 임하는 하나님 나라로
그 분은 지구상에서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은 지역 중 한 곳의 변두리 시골길을 타고 우리의 세상에 들어와서, 인류 역사를 향한 자신의 프로그램이 수십 세기를 두고 더없이 느릿느릿 펼쳐지게 두셨다.
그 분은 하나님의 언약과 교제의 부요한 전통이 있음에도,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나라의 사회적으로 하찮은 사람들 무리에 끼어 30년을 사셨다. 나사렛이라는 중동의 한 작은 마을의 목수 집에서 자라났다. 아버지 요셉이 죽은 후에는 ‘가장’이 되어 어머니를 도와 남은 가족을 거두었다. 그분은 보통 일꾼이었다. ”블루 칼라“ 노동자였다.
이 모든 것이 오직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며 자신의 삶을 우리에게 ”전할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한 질의 삶을 받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일 수 없다. 그러나 F. W. 페이버(Faber)의 한 심오한 저서 서두에 나오는 말처럼 ”예수는 우리에게 속해있다. 그분은 자신을 우리의 처분에 내어맡기신다. 그분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내어주신다.“
본서 Chapter 1. 영원한 삶의 현재성 · p.43 보통 세계로 오시다 중
우리는 ‘하나님 나라’ 혹은 ‘천국’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죽음 이후에 가게 될 장소를 먼저 떠올립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달라스 윌라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죽음 이후의 문제에만 국한할 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중요한 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사람들은 죽지 않았는데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완성된 하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달라스 윌라드는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우리가 죽은 뒤에 들어가는 먼 장소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부터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소식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에는 ‘지금부터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놀라운 소식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일상에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쩌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역과 내가 다스리는 영역을 나누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지만,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직장과 학교의 생활은 나의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은 신앙의 문제이지만 돈과 진로, 인간관계와 성공은 현실의 문제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뜻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이러한 구분은 점차 무너지게 됩니다. 내가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다른 사람의 성공과 실패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나를 화나게 한 사람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 직장에서 어떤 태도로 일하는지, 가족을 어떻게 대하는지와 같은 일상의 문제 역시 하나님 나라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산상수훈은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이라는 행동만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 행동의 뿌리에 있는 분노를 말씀하셨습니다. 간음이라는 행동만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을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를 넘어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행동 몇 가지를 종교적으로 바꾸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 인간관계와 욕망까지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라. 자격이 아니라 은혜로 열리는 하나님 나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음은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하지 않으셨다. “모든 영적인 수준이나 자질 면에서 빈곤하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것이 있어야 천국에 합당한 자가 된다.” 그분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영적 빈털터리 상태 – 그 자체로 전혀 선한 것이 아닌 –를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되는 훌륭한 마음가짐이나 태도로 바꿈으로써,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예수의 가르침의 훨씬 깊은 의미를 날려 버리고 만다.
그것은 곧 환희에 찬 복음의 선포를 또 하나의 진부한 율법주의로 대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복 있다” 하신 것은 그들이 자격이 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가 아니다. 정확히, 그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상태 속으로, 그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천국의 통치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 그들에게 임했기 때문이다.
본서 Chapter 4. 참된 부요를 누리는 자: 8복 · p.154 “영적 무일푼”도 천국의 손길을 느끼다 중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만한 자격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로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들어온 사람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산상수훈을 읽다 보면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살인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부족한데 분노하지 않아야 하고, 간음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부족한데 마음속의 욕망까지 다루어야 하며,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삶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더 어려운 율법에 불과한 것일까요? 윌라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행동을 하나씩 억지로 흉내 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예수님께 배우며, 점차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화를 참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미워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억지로 원수를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보복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자는 단순히 예수님에 관한 사실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자는 예수님께 삶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공부를 배우기 위해 선생을 찾고, 운동을 배우기 위해 코치를 찾으며, 일을 배우기 위해 먼저 경험한 사람을 찾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에게 배우고 있을까요?
달라스 윌라드가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삶을 가장 잘 아시는 분’으로도 믿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하나님 나라는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법, 내가 돈과 성공을 바라보는 방법,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대하는 방법,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내가 선택하는 방법 등에서 시작되게 되겠지요. 즉, 우리는 지금부터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눔 질문
-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를 주로 어떻게 이해해 왔나요? ‘죽은 뒤에 가는 천국’이라는 생각과 ‘지금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은 나의 신앙생활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까요?
- 교회와 예배, 기도와 말씀의 영역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돈이나 진로, 직장, 인간관계, 성공과 실패 등의 문제에서는 사실상 내가 주인이 되어 판단하고 있는 영역이 있지는 않은지 나누어 봅시다.
- 우리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것만큼 ‘삶을 가장 잘 아시는 스승’으로도 신뢰하고 있나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세상의 방식이 더 현실적이라고 느껴지는 문제가 있다면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다음 발제로 넘어가며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죽음 이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 가운데 임하고 있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셨다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까요?
이제 ‘구원의 확신과 제자의 삶’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2구원의 확신과 제자의 삶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분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여 그에 합당한 제자의 삶을 살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어 그 분과 함께 영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구원은 가벼운 것인가? 성경의 예시들을 보면 구원은 가볍게 느껴질 수 있다. 예수님 옆의 강도는 죽기 직전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말로 예수님께 구원을 얻었다. 삼손 또한 죽기 전 하나님께 힘을 주심을 구했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이런 예시들은 구원을 쉽고 가벼운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결코 가볍지 않다.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는 말로 구원에 대해 그가 갖는 엄숙함을 말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에도 끊임없는 죄들을 반복해 결국 심판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같은 환경 속에서도 이에 대한 반응은 개개인마다 모두 다르고, 하나님을 믿는 것도 모두 다르다.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지만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만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각 사람들에게는 좁은 문이지만, 모두에게 그 가능성이 주어진 좁은 문들의 넓은 집합체와 같은 개념 같기도 하다. 그것이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구원이자 복음인 것이다.
구원에 대해 알아보았으니, 다음 단계로 나아가보자. 그렇다면 나는 구원 받았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이 부분은 믿음의 선배들인 미국의 청교도들도 깊게 했던 고민인데, 막스 베버에 따르면 그들은 성경에서 구원을 받았음을 직접적으로 암시되는 믿음의 선조들의 행위를 자신들의 행위와 빗대어 그 확신을 얻고자 했다. 타인의 구원에 대해 함부로 생각하거나 판단할 순 없지만, 스스로의 신앙과 구원에 대해서는 오히려 생각하지 않는 상태가 그 길과 멀 수도 있다.
위의 질문에 대답하기가 난해하다면 아래와 같이 질문해보자. 나는 예수를 내 삶의 구주로 고백하는가? 직전의 질문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예수님이 내 삶의 구주, ‘구원하는 주인’이 되시는 것의 의미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하자.
교리적으로 보면 구원의 일곱 가지 여정은 다음과 같다. [소명, 중생, 회심, 칭의, 수양, 성화, 견인, 영화] 각 단계에 대한 설명은 다 다룰 수 없기 때문에 미뤄두고, 이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관점에서 바라봐보자. 하나님은 영원을 사시는 분이다.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개념인 시간과 공간이 그 분 앞에서는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하고, 우리의 인생은 그 분 앞에서 압축적인 하나의 점일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예정과 같은 개념이 존재할 수 있다). 시간의 개념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 ‘점’이 맺는 열매의 결과와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구원은 결국 하나님의 관점에서 YES/NO로 나눌 수 있는 것이고, 그 인생의 마지막이 어떤 방식으로 끝났는가가 선형적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에게는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이를 교리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자신의 삶의 마침표에서 위의 구원의 여정을 걸은 사람이라면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강도와 삼손은 구원을 받았다. 이를 통해 예수님 옆의 강도와 삼손은 죽음의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구원의 여정을 압축적으로 해낸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죽음의 순간이 다가올 때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분께 직접적인 도움을 구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아주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다시 기회를 주셔서 그들이 자신의 삶을 더 영위할 수 있었다면, 과연 그들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였을 것인가? 그랬을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발언과 바울의 히브리서 믿음 장의 의미로 감히 추측해 볼 수 있다. 한 점인 그들의 인생이 그들의 마지막 선택을 통해 NO에서 YES로 명확히 선회하지 않았을까? 하나님은, 예수님은 그것을 그 분들의 법정에서 사용할 명확한 증거로 보셨을 것이다. 나는 내 삶이 지금 마침을 가정할 때, 구원의 여정을 걸어왔고 앞으로 그런 삶을 살아갈 확신이 있는가?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런 관점에서 구원은 영원의 삶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자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그 분에 대한 확신을 갖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는 것, 그로 인해 그 분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가는 것에 대한 어느 한 쪽의 거리낌도 없는 상태인 것이다. 구원은 인격적이고, 상호적인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그렇기에 구원의 여정에서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그 분의 은혜가 심어질 나의 마음, 곧 토양이 중요한 것이다. 구원 사역에 있어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믿고 신뢰하지만, 전지전능한 분께서 허락하신 자신의 자유의지도 결코 경시하지 말자.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의’에 다다른 사람일 것이다. ‘의’와 반대되는 ‘죄’의 어원도 이를 뒷받침한다. 죄의 원어인 하타(חָטָא, ḥāṭāʾ) / 헤트(חֵטְא)는 화살이 과녁에서 빗겨감을 뜻한다. 만약 내 신앙 고백이 하나님께서 말하시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과 조금이라도 빗겨가 있다면 그것이 영원을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이라는 표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지 않겠는가?
결국 이 땅의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내 토양에 깊숙히 뿌리내린 확고한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은 흔들리고 떨어질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깊은 신앙의 고백이라는 깊은 뿌리 만이 우리가 가져야하고,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 옆의 강도와 삼손이 구원을 받고, 한 때 하나님을 알고 섬긴 사울과 솔로몬이 구원 받지 못했음을 기억하자.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 분을 내 삶의 주로 받아드리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어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누구나 순간마다 흔들리지만, 결국 최후에 하나님 앞에 ‘신 앞의 단독자’로 섰을 때, 내가 그 분 앞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세월의 풍파를 맞았지만 여전히 남아있고 앞으로도 남아있을, 믿음이라는 겨자 씨가 자라난 나무의 뿌리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자신만이 지실 수 있는 일인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죄를 대속하심과, 의의 전가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만이 아니다. 그 분께서 육신으로 함께 하시지 않더라도 그 사건을 기억하고, 그 분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세우는 일이셨다. 이 책의 2장에서도 나오지만, 많은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분리해 생각한다. 한 쪽에서는 죄의 대속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다른 한 쪽에서는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한다.
나는 어떤 복음을 내 삶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파적인 복음인가? 죄의 대속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것만이 자신의 복음이자 구원이라고 믿고, 제자의 삶에는 방점을 두지 않는 삶
좌파적인 복음인가? 교회에서의 종교적인 사역들이나 사회적인 활동들에 초점을 맞추고 살고, 자신의 죄성과 그에 대한 대속은 얼버무리는 삶
두 삶 모두 신앙과 삶의 분리를 초래할 수 있다. 나는 지금의 내 삶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믿지만, 그 분께서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란 확신이 있는가? 한 쪽에만 치우친 반쪽짜리 신앙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인가? 이 책의 2장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복음을 축소하고 완전한 구원의 길이 아닐 수도 있음을 제시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갈 때, 거룩한 산 제사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제자의 삶이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서 제자 삼으라’라는 명령으로 확장되었음을 잊지 말라. 그 두 명령은 지극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을 살라는 같은 명령이다. 그 명령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내 삶과 상관이 없거나, 하나님께서 말하고 계신 것이 아닌 내 방식대로의 하나님 나라를 좇고 있다면 그것은 제자의 삶이 아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무게를 아는 자도, 그 분이 명하신 제자 삼음의 길을 따르는 자도 아니다.
제자의 삶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신앙과 삶이 구분되지 않는 중도의 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28:19-20
나눔 질문
- 나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있나요?
- 나의 구원관은 무엇인가요? 우파, 좌파, 중도, 어떤 것인가요?
- 내가 생각하는 제자의 삶은 무엇이고, 삶에서 제자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